출처 : 법의 수레바퀴는 계속 구른다  |  글쓴이 : 큰수레 원글보기   



 

 

개인의 수행 체험을 이야기하자니

수행자에게 수행 체험을 이야기하라는 것은 주머니를 털어 보이라는 것인데 보여 줄 것도 없지만 탐진치에 얽매여 헤매는 중생의 입장이고 보니 그것이 머리 깎고 수행하는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인지 염려되었다. 그리고 파옥 명상센터의 수행법을 배운 수행자의 입장에서 수행센터에 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또 같은 길을 걷는 수행자들에게 누가 되는 일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수행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나도 수행을 해야겠구나!’하고 느낄 수 있는 글을 써서 독자들이 수행을 결심한다면 이 또한 훌륭한 회향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쓰기로 하였다.


약 5년 전 아버지와 고모님이 3개월 간격으로 돌아가신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하였다. 출가 후에도 늘 머릿속에는 ‘나는 죽으면 어느 곳으로 가는가?’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의문을 풀 수 있는 스승과 수행처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기도 중에 평소 알고 지내던 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더니 미얀마 파옥 사야도께서 쓴 『사마타 위빠사나』라는 책자를 주시며 읽어 보라고 권하셨다. ‘바로 내가 찾던 것이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2주 후 미얀마에서 초청장을 받았다.


 

3개월이 지나 상좌부계를 받다

미얀마 남부의 몬주 몰라민에 위치한 파옥 명상센터는 평상시 750여 명, 뗀잔 축제(물 축제, 4월 초순 4일간의 전국적인 명절) 시기 등 연휴 기간에는 1,450여 명의 수행자들이 모여서 『청정도론』을 근거로 한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곳이다. 모든 수행은 경전과 아비담마를 근거로 해서 수행하므로 교학과 수행을 모두 배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상좌부 전통을 유지하며 경전과 아비담마에 근거한 수행법을 배우려는 외국인 수행자들이 120여 명 정도 있다. 외국에서 온 수행자를 우선 배려한다는 의미에서 공양 시간에 법랍이 높은 미얀마 상좌부 스님보다 앞줄에서 공양받도록 하는 등 외국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눈에 띄었다.


계, 정, 혜 삼학에 기초한 이곳의 수행을 통해 도착한 날부터 기존에 품고 있던 불교에 대한 생각들이 깨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공양 시간이 되면 비구 스님이 공양간에 서 있는 재가자에게 빈 바루를 넘겨 주면 그 재가자는 다시 그 바루를 스님에게 준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혹 바루 안에 물방울이나 개미와 같이 주지 않은 것을 가지게 되면 계를 범하게 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철저한 오후 불식은 기본이고, 방 안에 모기가 들어오면 죽이지 않고 큰 잠자리채 같은 것으로 모기를 잡아서 밖으로 살려 보내 주는 모습도 평소 모기약을 칙칙거리며 뿌려 대는 습관이 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수행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 중에 두세 명의 스님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쪼그리고 앉아 합장하고는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이 많아 물어보니, 사소한 계율을 범하였을 때 재발 방지를 위한 참회 의식이라 하였다. 오염된 마음을 청정한 상태로 돌리는 의식인 셈이다. 보름에 한 번씩은 큰 법당에 모여서 포살을 한다. 포살이란 수행처의 모든 상좌부 스님들이 참석한 상태에서 비구계 227계의 계목을 외우면서 반성과 참회하는 시간을 갖는 의식이다. 법랍순으로 대법당에 앉아서 한 분이 계목을 암송하면 나머지 비구 스님들은 그것을 마음속으로 암송한다.

 

한편 비구가 거주하는 주변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이상해 물어보니 비구는 풀 등의 식물을 심거나 꺾으면 안 된다는 계목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참으로 불편하겠구나!’하는 생각과 계율의 정신이 중요하지 이렇게 불편하게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이 있으므로 단속하는 것이라는 설명에 수긍이 갔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나도 상좌부계를 받고 공부를 제대로 해 볼까 했으나 계율의 상이함 등 마음에 부담이 있어 결심하지 못하였는데 도착한 지 3개월이 지날 무렵 어떤 계기가 있어 상좌부계를 받고 ‘무디따 난다’, 즉 ‘남의 성공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곳의 주지 역할을 하는 쿤다다나(U Khundadana) 스님이 계사 스님이었다.


한국에서는 한 번 출가하여 계를 받으려면 6개월간의 행자 생활과 별도 기간의 득도 전 특별 교육 기간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곳은 도착하여 의사를 표시하면 오후에 계를 주거나 이튿날 계를 주는 등 바로 머리 깎고 상좌부 가사를 걸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계를 받은 사람은 철저하게 계율을 준수해야 하고 인연이 다하면 스승에게 비구 및 사미계를 반납하고 재가자로서의 5계를 받고 수행처를 떠나면 그만이다. 기간이 짧으면 단기 출가의 형태요, 계속 머물면 장기 출가(?)가 되는 셈이다.

 

 

 

 

이곳의 수행은 아나빠나 사띠, 32상, 까시나, 4무량심과 4보호 명상, 물질과 정신, 12연기, 위빠사나 등 초기 경전에 나오는 수행법을 남방불교의 부동의 준거가 되는 『청정도론』에 기초하여 배운다. 처음에는 물질과 정신까지만 볼 수 있다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했다. 수행이 진행되면서 까시나 수행을 통한 무색계 선정에 들지 않고도 색계의 네 가지 선정만으로도 위빠사나 수행이 가능하다고 해 지도 스님과 상의하여 까시나 수행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까시나 수행을 통해 무색계 선정을 닦느냐고 여쭈었더니 죽은 후 무색계천에 태어날 수 있고, 세 번째 도과인 아나함도과 성취 후 멸진정에 들 수 있는 조건 갖춤이라 하였다. 다행히 단계별 수행의 성취가 있었고, 불보살님의 가피와 지도 스님의 도움으로 위빠사나까지 마칠 수 있었다.


선정 수행

파옥 명상센터는 많은 수행자들이 한 번 와서 수행해 보고 싶은 곳이긴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숲 속 수행터라는 점과 수행 성적표가 바로 바로 나와서 수행 이력 관리가 필요한 분들은 부담(?)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수행 성취를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첫째는 선정에 들기 위한 니미따(안정된 마음의 표상인 빛)가 떠야 하고, 둘째는 오온의 인과를 보기 위한 전생과 미래생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은 바로 닙바나를 얻어 도과를 성취하는 것이다.

 

나는 도착한 이튿날 아침 9시에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챙기는 아나빠나 사띠를 지도받고 오후 2시경 빛이 떠서 그 자리에서 저녁 7시 40분까지 그 빛을 보았다. 그런데 이 빛은 호흡과 일치된 빛이 아니라 마음집중의 힘으로 발생한 빛으로 니미따는 아니었다. 니미따를 얻은 것은 약 보름이 지난 후로 수행의 첫 관문을 통과해 매우 기쁜 마음과 안도의 마음이 생겼고 동료 수행자들의 부러움을 받기도 하였다. 800여 명의 수행자 중에서 니미따를 얻어 수행을 진행 중인 분들이 10여 명 안팎이었으므로 나 역시 기쁨이 컸다.

 

그런데 호기심 많은 성격 탓에 선정이 무엇이냐고 물어본 것이 화근이 되었다. 선배 수행자가 선정은 니미따와 하나 되는 것이라는 말에 나는 그 후 약 8주간을 하나 되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이것이 독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 됨’의 의미를 나 혼자만의 해석으로 ‘이런 것이겠지?’하고 상상하고 기대하다 보니 시간은 흘러가고 기대한 것은 오지 않고, 마음은 초조해지니 니미따가 흐려졌다. 이렇게 니미따를 보며 두 달을 보내니 ‘나에게 선정은 인연이 없는 것인가?’하는 마음이 생겨서 지도 스님과 면담하니 그냥 니미따에 마음만 얹어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기대하는 마음도 모두 버리라 하셨다.

 

이렇게 마음을 비우니 4시간 앉으면 마치 2시간 정도 앉은 것 같은 시간 축약 현상이 일어났고, 명상 중이나 후에도 고요함과 행복감이 온몸을 감싸는 경험을 3주간 하였다. 이때는 아침에 4시간 혹은 4시간 30분 정도를 한 번에 앉았고, 오후에도 4시간 정도를 한 번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3주 정도 지날 무렵 지도 스님께서 “4시간 명상 동안 무엇을 하느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으시길래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행복하며 빛과 함께하고 깊은 바다 속에 있는 것처럼 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선정 시 나타나는 마음의 요소를 확인하라 하여 확인한 결과 선정에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초선부터 제 4선까지 색계 사선을 닦으니 약 4개월이 흘렀다.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이 있으면 선정에 들지 못한다. 선정에 들기 위한 과정 자체가 수행이다. 다만 선정 수행은 이러한 마음의 오염원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눌러 놓는 것이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부수어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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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수행과 루빠 수행

선정 수행 다음에 사대 수행을 하였다. 사대 수행은 물질의 덩어리인 육신이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사대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명상하는 것으로 아직 위빠사나 수행 단계는 아니지만 그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몸속의 단단하고 거친 것은 땅의 요소이다. 흐르거나 응집시키는 것은 물의 요소이다. 성숙시키거나 열기는 불의 요소이다. 움직이거나 지탱하는 것은 공기의 요소이다. 이렇게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이 없는 단지 요소로써 오랫동안 관찰을 거듭해 가니 집중된 마음에 기인한 빛이 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라는 12가지 요소에 마음을 챙기고 관찰하니 마음이 좀 더 집중되었다. 이 과정에서 육신은 단지 덩어리가 아니라 12가지 사대 요소에 불과하다는 통찰지가 생겼다. 그리고는 흰빛이 마치 얼음 덩어리처럼 투명한 상태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 투명한 물질이 다섯 감성, 즉 몸, 눈, 귀, 코, 혀 투명 요소였다.


다음으로 이 몸을 관찰하는 루빠(물질, 色) 수행을 하였다. 사대 수행을 통해 나타난 투명한 얼음 덩어리 같은 빛의 한부분에 마음을 집중하니 이 빛은 좁쌀보다 작은 크기의 입자로 쪼개져서 생멸을 거듭하였다. 이 입자가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들의 모임인 깔라빠다. 깔라빠는 투명한 것과 불투명한 것이 있다. 눈, 귀, 코, 혀, 몸의 알음알이, 즉 감성의 통로 역할을 하는 것들은 투명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투명하다. 이들은 극도로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사마타 수행을 통해 얻어진 선정, 마음 집중의 힘으로 이 깔라빠들의 생멸 속에서 지수화풍의 사대 요소, 색깔, 냄새, 맛, 영양소, 생명 기능, 심장, 남성·여성 요소를 구분하고 각각의 깔라빠에서 허공의 요소, 몸과 말의 암시, 물질의 가벼움, 부드러움 등의 추상적 요소를 구분하였다.  궁극적 실재에 해당하는 물질을 모두 구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지도 스님께서 내 몸 안의 물질을 보고, 다른 사람의 물질을 보게 한 후에 오로지 안과 밖의 세계는 모두 물질뿐이라고 명상하라 하였다.

 

이러한 명상을 계속해 나가던 어느 날, 해우소(화장실)에서 나오는 순간 내 앞으로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갔다. 그 순간 나비가 나비로 보이지 않고 물질인 루빠(rupa)가 날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발밑을 보니 대리석도 대리석이 아닌 생멸하고 있는 물질이요, 눈앞의 산과 돌과 나무와 수행자와 재가자 모두 구분 없는 생멸하는 물질이 아닌가? 나는 그때 모든 현상들은 단지 물질로 조건지워진 현상이라는 통찰지를 얻었다. 나는 나대로 ‘나라는 조건’으로 형성된 ‘물질’이고, ‘너는 너라는 물질’로 조건 지워진 현상이라는 지혜를 얻었다. 남자, 여자, 동물, 식물, 강아지와 같은 관념을 보는 것에서 궁극적 물질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들이 단지 조건 지워진 하나의 현상으로 인식하는 단계를 체험한 것이다.

 

 

12연기의 관찰

전생을 보았다.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명이 타파되어야 하는데 이 무명이라는 것은, 사성제를 모르고 과거·미래·과거와 미래 모두·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 오온의 인과를 알기 위하여 과거 5생까지의 나마(정신)와 루빠(물질)를 보고, 미래생에 언제 빠리닙바나에 드는지를 보았다. 이를 통해 현재의 나는 과거의 원인에 기인한 것이며, 미래의 나는 현재의 원인에 기인한다는 통찰지가 생겼다. 생과 생을 전전하는 윤회를 보았다.

 

 

사실 나는 이 수행을 하기 전에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단견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의심은 없어졌다. 윤회는 실재한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떠오른 업, 업의 표상 혹은 태어날 곳의 표상 중 하나가 새로운 생을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는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이 찰나 생하고 찰나 멸한다. 윤회는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의 세계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진실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오온이 찰나 생하고 찰나 멸하는 것 뿐이다. 이것이 역시 윤회라는 통찰지가 생기고, 이 순간의 윤회와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윤회가 다르지 않다. 다만 대상과 시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무아 윤회다. 단멸하는 측면의 죽음은 없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죽음은 없다. 다만 원인이 결과를 나타나게 하고는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이 결과 역시 일어나서는 사라질 뿐이다.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그렇다면 전생을 본다고 하였으니 숙명통을 얻었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러나 파옥에서 보는 전생은 나의 과거의 오온을 알고 보는 것으로 상응부 경전(『쌍윳다 니까야』)의 『바자니오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갑자기 죽은 사람, 혹은 치매에 걸려 죽은 사람, 전생에 수행의 공덕이 전혀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삼매의 힘으로 과거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오온의 실재를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퇴행 기법을 사용한다. 숙명통은 전생에 살았던 나라, 입었던 의복, 먹었던 음식 등을 알고 보는 신통지의 영역인데 이와는 다른 것이다. 생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과 이를 일으키는 원초적인 원인인 무명과 갈애, 취착이 무엇이었는가를 발견하고, 이러한 원인 때문에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였는지를 식별하는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


드디어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였다. 이전까지의 여러 수행은 이 위빠사나를 하려고 기초를 다지는 수행이다. 위빠사나는 개념이나 관념이 아닌 바로 궁극적 물질, 마음과 마음 부수 그리고 이것들의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를 수관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궁극적 실재인 물질-마음-마음 부수-원인-결과를 본 수행자는 이 궁극적 실재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찰나 생하고 찰나 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찰나 생하고 찰나 멸하는 현상에서 모든 것은 변해 간다는 무상을, 변하도록 압박받음에서 고통을,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에는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인 알맹이도 없고 고갱이도 없다는 무아의 통찰지가 생긴다.

 

 

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지혜(udayabbaya-nana)가 개발된 수행자는 사라짐의 지혜(방가냐냐, bhanganana) 단계를 수행한다. 오온과 이것들의 원인과 결과가 오로지 사라지는 현상만 있는 단계에 도달한다. 이 사라짐의 지혜에 도달한 수행자는 오온이 오로지 무너지는 것만을 보게 되고, 통찰지가 강해지면 사라지기만을 반복하는 현상도 없어지고 오로지 사라지기만 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는 파동, 무형의 파동만을 경험하는 단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상카라의 찰나 간의 소멸을 대상으로 명상하는 수행자가 계속해서 오온의 무너짐을 관찰하게 되면 오온의 무더기가 괴로움이라는 특성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두려움과 공포로 나타나고 위험하다는 지혜가 생겨난다. 이 단계에서 어떠한 알음알이도 도움이 안 된다는 지혜가 생겨난다. 이처럼 오온의 결점을 철저하게 보게 될 때 수행자의 마음에는 모든 상카라에 역겨워하고 지겨워지는 단계에 도달하는 역겨움을 관찰하는 지혜가 생긴다. 이처럼 역겹고 지겨워하는 수행자의 마음은 어느 하나의 상카라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오로지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통찰지를 해탈하기 원하는 지혜라 한다. 이러한 해탈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닙바나를 향하고 닙바나를 알고 본다.

 

오온의 실재에 대하여 철저하게 수관하며 깨어 있는 수행자가 과거의 바라밀(공덕)이 있다면 무상, 고, 무아를 수관하며 100% 깨어 있을 때, 삼매에 드는 과정처럼 마음은 닙바나를 경험한다. 마음과 물질의 멈춤, 마음과 물질의 소멸된 상태를 알고 본다. 아비담마 등의 이론서에는 공포의 지혜부터 도과를 성취하기 전 단계인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까지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파옥에서는 사라짐의 지혜 단계까지 수행 지도를 한다. 그 이후는 철저하게 사라짐만을 통찰하는 수행자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공포의 지혜부터 상카라의 지혜가 개발되고 이렇게 개발된 마음은 자연스럽게 최고의 평화와 행복인 닙바나로 향하게 된다는 마음의 법칙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진행하면서 나는 평소 가졌던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현대인에게 수행은 어떤 의미일까?', '특히 붓다의 수행법이 현대에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고통의 세계에 태어나 윤회하지 마라.', '태어났으면 고통받는 환경을 만들지 말고, 그곳에서 벗어나라.', '어쩔 수 없이 부딪치면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환경 역시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는 사실을 직시하라!"

 

파옥의 수행법을 정리해 보면서 짧지도 길지도 않은 지난 13개월간의 미얀마 파옥의 생활이 머릿속을 스친다. 청정한 계율과 법을 지도하는 훌륭한 스승,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도과를 성취하기 위하여 모여든 훌륭한 도반들, 이들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원하고 공양하는 재가불자들, 한 마디로 미얀마 파옥은 불교의 천국이며 부처님의 정법이 살아 숨 쉬는 도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파옥은 성스러운 곳이다. 아비담마에 근거한 수행법이므로 정법의 확신이 있고, 자세하고 빈틈없는 지도를 받다 보니 이대로만 하면 틀림없이 도과를 성취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생겼다.

 

처음에는 물질과 정신을 보는 루빠와 나마 수행까지만 하고 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지도 스님과 도반 스님들과 불보살님의 가피로 위빠사나 과정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그림자는 본 셈이니 아라한 도과를 얻기 위한 수행의 고삐를 좀 더 움켜쥐어야겠다. 그러나 한국에는 한국의 수행 전통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공부도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일정 시간은 한국불교와 현장을 익히는 데 쓰려고 한다.

 

파옥의 수행은 진도 관리 및 수행 단계별 성취가 뚜렷하다. 수행 성적표(?)가 모두에게 공개되는 셈이다. “수행 진도는 많이 나갔는데 왜 그 사람의 행동은 변하지 않을까?”하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북방불교 선가의 인가라는 것이 남방불교에는 없다. 자기가 닙바나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의 탐진치와 무명이 얼마나 옅어졌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어떠한가?’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훌륭한 수행법이 널리 퍼져 나가기를!
이 인연으로 많은 수행자들이 수행의 성취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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