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
전재성 지음
이 논문은 <불교평론> 제4호(2000년 가을), pp.281-306에 게재된 것이다. 저자의 사전 허락을 받아 여기에 게재하지만, 저작권은 <불교평론>에 있다.
서울대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석박사과정 수료(철학박사). 독일 본 대학 박사과정에서 인도학·티베트학 연구. 현재 한국 빠알리 성전협회 대표. 역서로 《쌍윳따 니까야》(1·2·3) 《인도사회와 신불교》 《범본대조 서장금강경》이 있고, 저서로 《빠알리어사전》(1·2) 《거지성자》 《범어문법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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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만들어 쌍윳따 니까야 3권을 출간한 지 꼭 한 해가 되어 간다. 빠알리 성전 번역의 원을 세운 지 8년 만의 일이지만 감개무량한 사업의 작지만 본격적인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불보살의 가피와 여러 스님들의 사심 없는 도움으로 비롯되었다.
지금 경불련의 초기불교 경전 읽기 모임에서는 매주 시범적으로 쌍윳따 니까야 읽기 모임이 진행중이다. 중국에 의존하지 않는 최초의 원전번역이라 조심스럽게 접근했지만 읽어갈수록 여러 부족한 점이 많이 눈에 띄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알기 쉽게 번역할 수 있다니” 하는 격려에 힘입어 번역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상윳따 니까야의 완역은 이미 끝났고 지금 편집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빠알리 니까야에 매료가 된 것은 수학의 법칙보다도 자명하고 명석한 초기경전의 논리 때문이었고 그 수정처럼 맑은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애쓴 페터 노이야르 선생의 삶을 상기하며 니까야 번역에 임했다. 작년에 《거지성자》라는 책과 더불어 쌍윳따 니까야를 출간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페터 노이야르 선생은 빠알리 니까야를 읽는 이유를 “사람들이 붓다가 걸어갔던 길과 동일한 높이를 설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붓다를 신격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신격화하여 우상숭배하듯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매불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대승불교권에서는 남방의 상좌부 불교(therava-da)를 소승(h1-naya-na)이라고 비난하여 왔다. 그러나 남방불교에서는 소승이라는 말을 알지 못한다.
대승불교권에서 일방적으로 상좌불교를 핍박하여 자신의 우위를 주장한 것이다. 소승의 소(小:h1-na)라는 말은 ‘낮은, 열등한, 비열한, 결여된, 부족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귀족화되고 화석화되어갔던 부파불교들을 다시 민중 속에 살아 있는 종교로 개혁하기 위해, 그리고 근본불교의 정신인 연기즉공(緣起卽空)의 사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승의 공사상으로써 부파불교를 핍박한 것은 불가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방의 상좌부에서 보존되어 온 빠알리 대장경은 역설적으로 연기즉공의 근본불교의 성전으로서 역사적인 부처님의 원음을 담고 있다. 진정한 대승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빠알리 근본불교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빠알리 대장경 가운데 경장에 해당하는 니까야는 북방의 한역 대장경 가운데 아함경에 해당하므로 대승의 한역장경으로 충분하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빠알리 어는 표음문자로서 대단히 분석적이고 구체적인 언어구조를 갖고 있는 인도 유럽어이고, 한문은 표의문자로서 직관적이고 추상적 언어구조를 갖고 있다. 부처님의 원음인 니까야는 아함경으로 번역되면서 그 분석적인 언어 구조를 상실하고 추상화되고 격의(格義)불교화된 감이 없지 않다. 역사적인 부처님은 분별론자라고 불리웠는데, 그것은 빠알리 대장경에서 다르마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밝혀지는 일이다.
더구나 니까야와 아함경이 서로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에 빠알리 대장경을 일본의 남전 대장경처럼 한역술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번역한다면 그것은 빠알리 대장경이 아니라 아함경이 될 것이다. 이밖에도 나중에 발전한 대승불교의 현란한 교리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또는 흔히 발생하는 교리의 잘못된 왜곡과 굴절을 시정하기 위해서도 초기불교의 원형을 담고 있는 빠알리 경전을 읽어야 한다. 이하에서 빠알리 니까야를 왜 읽어야 하는지를 좀더 부연하고자 한다.
2. 빠알리 어와 부처님 말씀
1) 부처님 말씀으로서의 빠알리 어
빠알리 어의 기원에 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지만 마가다 어에 기초한 사교어로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서 오늘날의 영어처럼 널리 쓰인 보편어(lingua franca)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보편어에 기초해서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사용되고 있는 불교성전인 빠알리 대장경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알고 있기는 부처님께서 범어를 사용하지 않고 당시의 민중 언어인 지방어나 방언을 사용했다고 알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각 나라의 방언으로 번역되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알고 있으나 여기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이론이 존재한다. 율장의 소품[1]에 보면, 두 수행승이 수행자들이 다양한 지방의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각자의 방언으로(saka-ya niruttiya-) 부처님의 말씀을 왜곡시킨다고 불평을 늘어 놓았다.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범문시로(chandaso) 표현할 것을 제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그 표현을 두고 역사적으로 각 학자마다 달리 해석하면서 민중의 언어와 빠알리 어의 권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그 문제가 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anuja-na-mi bhikkhave saka-ya niruttiya- buddhavacanam. pariya-pun.itum.
이 문장을 리스 데이비드(Rhys David)와 올덴베르크(Odenberg)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형제들이여, 나는 깨달은 이들의 말을 각각 그 자신의 방언으로 배우도록 허락한다(I allow you, O brethren, to learn the word of buddhas each in his own dialect).[2]
그러나 붓다고사의 주석을 참고하여 가이거(W. Geiger)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깨달은 이의 말을 그 자신의 언어로 ―즉 부처님이 사용한 언어인 마가디 어로― 배우도록 허락한다(Ihr Bhikkhus, Ich verordne, das Buddhawort in seiner eigenen Sprache d.i. in der vom Buddha gesprochenen s.prache, der Magadhi).[3]
두 학자의 번역은 완전히 상반된다. 우선 buddhavacana란 단어를 리스 데이비드는 ‘깨달은 이들의 말’이라고 복수로 해석했고 가이거는 ‘깨달은 이의 말’이라고 단수로 해석했다. 그리고 saka-ya niruttiya-란 말을 리스 데이비드는 ‘그 자신의 방언으로’라고 해석해서 ‘배우는 형제들의 방언으로’라고 해석하는 데 비해 가이거는 ‘그 자신의 언어로’라고 해석하여 ‘깨달은 이가 말한 언어로’라고 해석하고 있다.
필자가 거듭 숙고해 보아도 질문이 귀족적인 언어인 범어를 사용해서 설법해 주시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것이지 그때 그때의 속어을 사용해서 다양한 언어로 설법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식자층이나 귀족층의 언어인 범어로 설법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결정적으로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위와 같이 당시의 민중적이긴 하지만 보편어였던 빠알리 어를 사용한다고 답변을 한 것이다.
이것은 가이거의 말에 따르면 스승이 선언한 것 이외의 다른 형태의 진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가다 어에 기초한 빠알리 어 설법의 보존 이외에 다른 언어에 기초한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빠알리 어는 당시에 인도에서 오늘날의 영어처럼 사용되던 사교어였고 보편어였고 경전은 당연히 빠알리 어로 전승된 것이다. 가이거는 부처님께서 사용한 빠알리는 순수한 속어가 아니고 부처님 이전부터 활발한 교역이 만들어 놓은 높은 지성적 언어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빠알리 어로 전승된 대장경이야말로 스승의 가르침을 올바로 보존하고 있어 전승의 권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빠알리 니까야의 학문적 중요성
우리가 불교의 기초적인 개념이나 원리를 명확히 규정지어야 할 때에 어떠한 언어로든 번역된 것에 토대를 둔다면, 잘못 파악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원의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더구나 문법적으로 정교한 인도의 고전어가 한문으로 번역되면 더 이상 그 취지를 올바로 파악하기가 힘들어진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가장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연기에 관한 정의도 마찬가지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연기(緣起)란 말의 빠알리 어 어원은 pat.iccasam-uppa-da이다. pat.icca-sam-uppa-da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복합어는 불교 이전의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불교 고유의 용어이다. pat.icca는 ‘조건적으로, 연(緣)해서’란 의미이며, samuppa-da는 ‘일어남(起)’ ‘함께 일어남(集起)’ 또는 ‘발생·생성·생기(生起)’의 뜻을 지닌다.
그러므로 연기란 말은 ‘조건적 발생’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연기의 어원에 대한 좀더 심층적인 분석은 아비달마에서 이루어졌는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빠알리 어 연기의 원어 pat.iccasamuppa-da의 어원 prati-∨i-tya-sam-ut-pa-da에 포함된 어의의 분석이다. 그것은 어원적으로 ‘의존해서, 또는 조건적으로(prati-∨i-tya) 함께 생기함(sam-ut-∨pad)’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원인의 화합이 이 ‘원인’을 조건으로 ‘결과로’ 향해 가는 까닭에 연(緣)이라고 하며, 또한 그 ‘원인의 화합이’ 수반된 것들을 생기(俱生)하는 까닭에 기(起)라고 한다.[4]
여기서 pat.icca를 pat.imukhamito ‘향해서 가는’이라는 인과의 근접성으로 해석한 것은 pat.icca가 pacceti ‘다가가다, 의지하다’의 절대사(abs.)인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과학적 측면에서 보면, 결국 연기란 ‘조건적으로 함께 생겨남’을 의미하지만 한역용어인 연기란 말에서 그 정확한 의미를 끌어내기가 힘들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연기사상에 대한 정의를 들 때에 한역 아함경에 나오는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이란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번역은 단지 원인과 결과 사이의 논리적인 관계나 의존성만을 설하지 조건적이고 구체적인 생성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은 니까야에 등장하는 빠알리 장경의 원어를 살펴봄으로써 보다 쉽고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원시불교에서뿐만 아니라 아비달마불교나 대승불교에서도 그 근본이 되는 연기사상에 대한 정의로 인구에 회자되는 너무나도 유명한 다음과 같은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정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에 관한 분석은 연기 자체의 개념에 대한 분석보다 소홀히 취급되었다.
① imasmim. sati idam. hoti,
② imassuppada- idam uppajjati.
③ imasmim asati idam. na hoti,
④ imassa nirodha- idam. nirujjhati [5]
위 문장은 필자가 그대로 번역한다면 아래와 같아진다.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이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이것이 소멸한다.
여기서 “이것이 있을 때에 이것이 있다.(imasmim. sati idam. hoti)”라는 말은 우리의 언어 습관으로는 ‘이것이 있을 때에 저것이 있다.’라고 바꿀 수 있고 빠알리 어의 성격상 ‘이것이 있다면, 저것이 있다.’라고 번역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렇게 놓고 볼 때에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라는 한역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이것과 저것의 논리적인 관계나 이유만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인과론을 최초로 정립한 데이비드 흄은 인과론의 기본원칙으로 “원인이 있다면, 언제나 결과가 있다(If C, then always E.).” 라는 원리를 제시해서 인과관계의 조건성·반복성·근접성·필연성 등의 원리를 확립하였다.
이 원리는 놀랍게도 빠알리 니까야가 제시하는 원리와 너무나 동일하다. 서로 전혀 다른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 전혀 다른 시기에 발견된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흡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진리의 보편성과 관계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원리인 “이것이 생겨나므로 이것이 생겨난다(imassuppada- idam uppajjati).”는 원리는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이라는 번역이 잘 뒷받침해 주긴 하지만 빠알리 어 문장으로 볼 때에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고 원인을 나타내도록 조건적으로 번역한다고 해도 지장이 없다.
이 원리는 불교를 전혀 모르는 서양의 붕게(Bunge)라는 한 현대 과학철학자가 데이비드 흄의 원리를 보정하기 위해 주장한 인과관계의 일반원칙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원인이 생겨나면, 언제나 결과가 그것에 의해 생겨난다(If C produces, then E is always produced by it.).[6]”는 원리를 내세워 무인론으로 치닫게 된 현대 서양의 인과론을 보정하여 중도적인 인과관계를 확립하였다.
이렇게 볼 때에 원전의 현대적 번역과 그 의미의 재발견은 경전을 읽는 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위의 네 가지 원리에 대하여 역대 논사들은 기본적으로 첫번째 원리의 강조 정도로 치부하였으나 필자는 그것들이 고집멸도의 사성제와 관계가 된다는 것을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이라는 책에서 밝혀 놓았다. 단지 여기서 더 이상 논하는 것은 주제와 맞지 않으므로 생략한다.
3. 빠알리 니까야의 특성
1) 빠알리 니까야의 심오한 깊이
불교의 세계관은 호한하고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대승경전 가운데는 심오한 불교의 우주관을 찬란하게 묘사한 경전들은 많지만 인간의 실존적 깊이에 대해 시공간적으로 니까야처럼 심도 있게 진술하고 있는 경전은 없다.
아함경에도 나오지 않는 경전 가운데 한 예를 들어보자.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와 사대양에 있는 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욱 많겠는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으로 미루어보건대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설한 가르침을 제대로 잘 알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물소로 태어나 물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양으로 태어나 양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염소로 태어나 염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사슴으로 태어나 사슴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닭으로 태어나 닭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돼지로 태어나 돼지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7]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길섶에서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부녀자를 약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위의 경전을 마루어 보건대 부처님의 동체대비의 사상은 단순히 깨달음에서 나오는 형이상학적인 추론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랜 세월을 유전윤회하면서 우리 자신이 바로 도살되는 소였고, 염소였고, 목이 잘리는 도둑이였고, 부녀자를 약탈하던 파렴치범이었다.”는 실존적이고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자각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한 경전 속에 모든 인간과 환경과 사회문제와 거기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깊은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다. 현재 경불련에서 주최하는 경전읽기 모임에서 10여 명의 참가자와 이 경전을 읽었을 때에 아주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경전이기 때문이었다.
한 참가자는 윤회에 관해서 믿을 수 없다는 견해를 취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실존에 관해 무지하다. 불교에서 윤회는 인간의 영혼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영원주의와 죽으면 끝이라는 식의 허무주의를 조심스럽게 배격하는 중도적인 윤회를 선택하고 있고 윤리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에 방황하는 현대철학이나 과학의 항해도를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환경론자들의 현대문명에 대한 각종 통계수치를 살펴보면 인류는 지구에서 단시일 안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타종교에서처럼 인간의 영혼의 영생을 믿어 현실을 외면한 채 죽은 후에 절대자의 오른편에 앉아 영생하길 바랄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멸망하는 지구 위에서 죽은 다음에는 끝이므로 물질적인 쾌락을 최대한으로 누리고 가용자원을 다 소모하고 사라질 것인가? 둘 다 윤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오늘의 삶이 어제의 우리의 삶과 다르면서 지속하듯 우리가 죽은 후에도 인류가 멸망한 후에도 윤회하며 지속하는 삶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는 결코 윤리적인 삶을 선택해야 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윤회는 오히려 지구를 멸망으로 이끄는 경향을 바꾸는 기술과학의 항해도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참가자는 이 경전을 읽고 우리는 항상 사소한 일에 매어 고통을 당하는데 여기 이 경전에서는 무량한 겁으로 관통하는 죽음이라는 우리의 실존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방대하고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면 사소한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확실히 죽음의 문제는 윤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죽음이야말로 완전한 적멸이라고 볼 때에는 완전한 열반에 든 자만이 죽은 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윤회란 지속적인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의 한 수행자가 말했듯이 역사상 죽은 자는 석가모니 한 분밖에 없는지 모른다는 등의 재미있는 담론이 오고갔다.
윤회의 문제는 그것이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정서적으로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의 삶과 환경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세계관이다. 단지 그것이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니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어떻게 유전윤회하는지를 살펴보면 되는 것이다.
2) 빠알리 니까야와 자율적인 윤리
대승불교의 사유가 우주적이라고 한다면 빠알리 니까야의 사유는 심오하지만 일상적이고 윤리적이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만큼 일상적인 사유 속에서의 준거틀이 필요하다. 일상적인 가르침만이 원천적으로 우리가 모든 고통 속에 빠지기 전에 사전에 예지적으로 우리를 그러한 미래적인 고통에서 해방시킨다.
인도에는 불교 이전의 베다철학에서는 주술적인 찬탄과 기원이 그들의 신앙생활의 전부였다. 우파니샤드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아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고 카르마를 중심으로 한 윤리적인 사상의 맹아가 싹트게 되었다. 인류역사상 형이상학을 배제한 순수한 윤리체계가 신앙화된 것은 바로 이 우파니샤드와 동시대적으로 성립한 초기불교에서였다.
초기불교는 유신론적인 모든 다른 종교나 무신론적인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자명하고 명증적인 자율적 윤리체계를 확립하였다. 불교 윤리의 기본적인 입장은 인간 자신의 명증적인 인식―악은 스스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를 해치는 것이다.―에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윤리적 인식에 토대가 되는 것은 상호의존하는 세계에 대한 올바른 통찰이다. 따라서 참다운 불교의 신앙은 주술적인 믿음이 아니라 윤리적인 통찰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 당시의 초기불교에서 불교는 가족 내부에서 바라문적인 종교적인 의례를 갖지 않았다. 바라문교는 인생의 중대 시기에 항상 주술적인 종교의례를 행했다. 즉 출생·명명(命名)·입교·결혼·사망시에는 제의를 행했다.
그러나 붓다는 원칙적으로 이러한 모든 것을 미신적인 것으로 배척했다.
예를 들면, 마하나마라고 하는 샤캬 족의 사람이 붓다에게 “제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질문하자 붓다는 다음과 같이 쌍윳따 니까야에서 말했다. “마하나마여, 두려워하지 말게. 그대의 죽음은 악하지 않다. 그대의 임종은 나쁘지 않다. 육신이 4원소로 되어 있고 부모에게서 생겨났으며, 음식과 죽으로 길러진 것이고, 무상한 것으로 마멸하고 괴멸하고 파멸되는 것이며, ……여러 가지의 생물들이 먹어치우더라도, 오랫동안 신앙을 닦고 계행을 닦고, 학문을 닦고, 놓아버림을 닦고, 지혜를 닦았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고양되어 탁월한 곳으로 간다.”그러나 남방에서는 호주(護呪:paritta)라는 민속적인 주문을 경전의 모음집에 포함시켜 집을 새로 짓는다든지, 장례를 지낸다든지, 질병을 앓을 때에 호주의례를 행해오는데, 이들 가운데 중요한 호주는 다름이 아니라 지송경(持頌經)의 경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붓다는 한 제자에게 ‘뱀의 축복’이라는 주문을 가르쳤는데 내용은 뱀에게 ‘자비의 마음이 스며들게 하기 위한(mittena cittena pharitum)’ 진언(붓다의 말씀)이었다. 따라서 부처님의 말씀을 신앙화하여 일상적으로 주문처럼 지송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허용되었던 것 같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고통을 싫어한다. 그들에게 삶은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죽이지도 말라.”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기복적인 어떠한 주술보다도 우리를 정신적인 힘과 평안으로 이끄는 보다 깊은 신앙으로 초기불교도들에게 구전되어 살아 있는 우리의 존재의식으로 내재화되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이러한 가르침이 경전화되어 단지 이해의 대상이 되었을 뿐, 신앙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주술적인 기복에 자리를 양보하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가르침이 죽어 있는 가르침이 아니라 온 가족의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생명의 자양분이 될 수 있도록 부처님의 말씀을 신앙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고통을 싫어하나이다. 그들에게도 삶은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들 속에서 저 자신을 인식하오니 괴롭히지도 죽이지도 않겠나이다.”
3) 탁월한 비유를 통한 가르침
빠알리 니까야는 모든 가르침에 관해 아주 적절하고 구체적이고 탁월한 비유로 가득 차 있다. 그 비유는 단지 교리와의 논리적 연관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시적이고 일상적이며 우리의 명상이나 수행 속에서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추상적이고 언어적인 사유를 모두 구체적인 그림으로 끌어내어 비유로서 한 번 더 설명하는 것이 빠알리 니까야의 특징이다. 상당히 난해하고 추상적인 12연기에 관해서도 많은 비유가 있지만 그 한 예로 물의 흐름에 관한 비유를 들어보자.
수행승들이여, ‘연기는’ 마치 무거운 빗방울이 산 위에 떨어질 때 물이 밑으로 흘러서 산의 계곡·협곡·지류를 이루는 것과 같고, 산의 협곡·계곡·지류를 이루고 다시 작은 못을 이루는 것과 같으며, 작은 못을 이루고 다시 큰 못을 이루는 것과 같고, 큰 못을 이루고 다시 작은 강을 이루는 것과 같으며, 작은 강을 이루고 다시 큰 강을 이루는 것과 같고, 큰 강을 이루고 다시 큰 바다, 대양을 이루는 것과 같다.[8]
이것은 인과연쇄를 물의 흐름으로 비유한 것이다. ‘빗방울→계곡→협곡→지류→작은 못→큰 못→작은 강→큰 강→바다’가 형성되는 것처럼 연기관계에서도 인과적인 과정의 흐름이 발견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무명의 물방울이 생로병사의 바다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탁월한 비유이다.
또한 빠알리 니까야는 악업을 저질러도 현세에서 잘 살고 있고 착한 사람이 오히려 고난을 받게되는 현실적 모순과 업보의 다양성에 관한 난해한 질문도 소금물의 비유로서 간단하게 해결한다.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사소한 악업을 저질렀어도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 그러나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똑같이 사소한 악업을 저질렀어도 바로 이 생에서 감수되고 경험되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9]
“수행승들이여, 한 사람이 한 줌의 소금을 발우의 적은 물 가운데 던진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행승들이여, 그 발우의 적은 물은 그 한 줌의 소금으로 짜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되지 않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왜 그러한가?”
“세존이시여, 발우 가운데 그 물은 적습니다. 물이 그 한 줌의 소금에 의해서 짜져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수행승들이여, 한 사람이 한 줌의 소금을 갠지스 강에 던진다고 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행승들이여, 그 갠지스 강의 물은 그 한 줌의 소금으로 짜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세존이시여, 갠지스 강의 물의 양은 많고 그 한 줌의 소금으로는 짜져서 마실 수가 없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사소한 악업을 저질렀어도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 그러나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똑같이 사소한 악업을 저질렀어도 바로 이 세상에서 감수되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10]
그밖에도 빠알리 니까야에는 불교의 모든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과 비유를 갖고 있다. 최근에 쌍윳따 니까야에서 탐진치와 열반에 대한 아주 놀라운 비유도 발견했다. 나그네가 집을 떠나 긴 여행을 하다가 늪지대를 지나 험준한 산맥을 넘고 다시 사막을 지나 푸른 평원에 도달한다. 그때에 늪지대는 탐욕을 상징하고 험준한 산맥은 성냄을 상징하고 사막은 어리석음을 상징하고 푸른 평원은 열반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4. 빠알리 니까야의 정통성과 무도그마성
1) 빠알리 니까야의 정통성
초기경전을 빼놓고는 불교를 일상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인구에 회자되는 경전들 가운데 《법구경》이나 《숫타니파타》 등은 모두 빠알리 니까야에 속해 있는데 매우 일상적이고 알기 쉬운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이다.
이들 경전은 대승불교 국가인 우리 나라에서도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며, 그 내용의 탁월함은 부처님이 아니고서는 서술할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빠알리 경전에 실려 있는 모든 것이 역사적인 부처님에게서 유래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적어도 제자들의 기억 속에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부처님에 대한 기억이 맥박칠 때에 수집되어 전승되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디가 니까야의 《대반열반경(Maha-parinibba-nasutta)》[11]을 읽을 때에 독자들은 부처님의 최후의 생애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전제되어 있다는 인상 없이는 읽을 수가 없다.
이러한 느낌은 신격화된 부처님의 생애를 묘사하고 있는 대승의 《보요경(普耀經:Lalitavistara)》이나 《불소행찬(佛所行讚)》 같은 경전과는 완전히 대조가 된다. 많은 경전과 율장에 있는 계율이 모두 부처님께서 직접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한 것들은 이미 존재하는 부처님께서 스스로 완성시킨 정신적인 틀에 끼워맞추어 제자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빠알리 경전에 대한 의혹을 너무 증폭시켜서는 안 된다. 경전의 대부분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200년 안에 성립된 것으로 당시만 해도 부처님에 대한 생동하는 기억이 제자들과 민중들 속에 살아 있을 때였다. 특히 가장 오래된 쌍윳따 니까야를 보면 우리는 부처님과 제자들과의 문답 속에서 마치 공자의 《논어》를 읽는 듯하거나, 크세노폰이나 플라톤의 작품 속에서 소크라테스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공자의 《논어》나 소크라테스와 다른 점은 빠알리 대장경은 종교적 관점에서 수행자가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배워 실제 수행했던 필수불가결한 종교적인 지식을 중심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가 되도록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연발생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상황이나 사태 또는 가르침은 판에 박은 말로 구성되어 있어 때로는 지루하게 반복이 된다.
그러나 경전을 외우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반복되는 구절은 지루한 것이 아니라 때때로 리듬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반복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르침의 암기와 상기에 좋은 영향을 미치며, 경전의 정통성과 사실성을 입증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동일한 경전이 인물과 장소만 바뀌면서 지루하게 반복되는 경우가 있는데, 처음에 불경을 읽는 사람은 마치 《구약성경》에서 인류의 조상의 계보를 읽는 것만큼이나 지루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경전의 경우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 순차적으로 읽는 것만으로 경전을 외우게 되고 우리의 잠재의식에 남아 자연스럽게 우리를 해탈의 길로 인도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경전은 또한 전승의 지역적 차이를 입증하는 것으로 경전이 어느 한 편집자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수집되어 편찬된 것을 입증하는 것인데, 이는 빠알리 니까야의 역사적인 실제성과 정통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빠알리 니까야의 분석적 세계관과 무도그마성
부처님이 빠알리 니까야에서 설하는 메시지는 철저하게 분석적인 관찰에 입각해 있다. 이를테면 빠알리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마치 두 개의 구멍을 가진 푸대자루에 여러 가지 곡물이 들어 있듯이 이 신체를 32가지의 부정물(不淨物)―머리카락·몸털·손톱·이빨·피부·고기·근육·뼈·골수·신장·심장·간장·늑막·비장·폐·창자·장간막·위장·배설물·담즙·가래·고름·피·땀·지방·눈물·임파액·침·점액·관절액·오줌―로 가득 차 있는 푸대자루처럼 하나하나씩 그 내용물을 열거하면서 분석적으로 그 부정(不淨)함을 관찰할 것을 권하고 있다.[12]
또 다른 신체에 대한 관찰방법으로는 네 가지의 비인격적인 원소인 지수화풍의 4대로써 분석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숙련된 도살자가 소를 도살해서 네 거리에 부분부분을 나누어 놓는 것과 같이 신체의 부분을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로 분류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에서는 우리의 신체는 내부적인 지수화풍으로 구성되고 있고 일반적인 지수화풍은 외부적인 것으로 나눔으로써 순환적인 생태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머리카락·털·손톱 등의 개체적이고 거칠고 견고한 것은 모두 내부적인 땅이며, 담즙·가래·고름·피 등의 개체적이고 액체적인 것은 모두 내부적인 물이며, 열·노쇠·소화·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현상 등을 수반하는 개체적이고 에너지적인 것은 모두 내부적인 불이며, 상풍(上風)·하풍(下風)·출식풍(出息風)·입식풍(入息風) 등의 개체적이고 진동하는 것은 모두 내부적인 바람이다.
이처럼 수행에 있어서의 분석적이고 경험적인 관찰은 초기불교 경전의 중요한 특성이다. 붓다는 경험적인 인과원리에 따라 《아쌀라야나경(Assala-yanasutta)》에서 성직권의 신수설을 다음과 같이 부정하고 있다. 인간은 절대신이나 운명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결정되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생물학적 조건에 따라 태어난다. 성직자들의 아내에게도 월경·임신·출산·수유가 존재한다. 이렇게 성직자들도 동일하게 모태로부터 태어났다.[13]
바라문교에서는 월경·임신·출산·수유 등을 부정한 것이라고 보아서 심지어 여아를 초조(初潮) 이전에 더럽혀지기 전에 시집을 보냈다. 붓다가 ‘월경·임신·출산·수유를 갖는 여인’이란 말을 강조한 것은 당시 바라문교의 정·부정(淨不淨)의 사상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것이 인간적인 현상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인간은 누구나 여인에게서 태어난다는 주장은 상층계급의 성직권의 신수설이나 왕권신수설을 부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신으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이 없다. 따라서 범신론적 영구법적 자연법사상은 허구이며 거기에 근거하는 상층계급의 특권적, 또는 선민적인 사상은 거짓이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자유롭다. 명백한 것은 인간은 어느 계급이건 인간적인 여인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신학이나 형이상학의 허구를 드러내어 중도사상이나 공사상을 천명하는 데도 탁월한 논리적인 분석을 보여주고 있다. 빠알리 니까야에는 용수의 팔부중도(八不中道)를 능가하는 14부중도의 사상이 등장한다.
이러한 중도적인 분석에 관하여는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빠알리 니까야[14]는 이러한 분석적인 관찰과 논리적인 분석을 통하지만 그것들을 뛰어넘어 진리의 수호에 관하여 이와 같이 말한다. 만일 나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와 같이 믿는다.”라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좋아함이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좋아한다.”라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배운바가 있다면 “나는 이와 같이 배웠다.”라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수호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사물에 대한 분석이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사물에 대해 분석한다.”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수호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이념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이념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수호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도그마에 입각한다면, 그 도그마는 우리를 외부적으로 증오에 사로잡히게 하고 내부적으로 노예화시킨다.
따라서 부처님은 니까야에서 모든 가르침과 계율에 관해 “나는 이와 같이 말한다.”라고 언표하지 “나는 이와 같이 명령한다.”라고 하지 않는다. 빠알리 니까야는 다른 종교의 타율적인 윤리체계를 따르지 않고 자율적인 윤리체계를 따른다.
3) 빠알리 니까야와 신앙생활
빠알리 니까야에 기록된 가르침은 출가 제자들이나 신도들이 자율적 윤리체계로 인식하여 자발적으로 선택할 때에는 단지 가르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삼귀의와 함께 일상의식에서 늘 독송되는 신앙 지침이 된다. 예를 들어 빠알리 니까야에 기록된 오계는 단지 중국에서 번역된 것처럼 불살생·불투도·불사음·불망어·불음주가 아니라 상세한 생활 지침을 내포하고 있다.
이 오계를 붓다 당시의 원어에서 그대로 번역해보면 자명하게 나타난다.
불살생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말은 일상적이고 구체적이고 실행가능한 담론을 포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두번째 불투도란 말도 애매하다. 세상이 모두 도둑놈인데 도둑질이 어디 있는가 묻는다면 애매해진다. 그러나 원어에는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세번째 불사음이라는 말도 어느 정도까지 사음으로 규정할 것인가가 애매해진다. 원어를 번역하면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이다.
네번째, 불망어도 거짓말의 한계를 어디까지 보아야 하느냐의 논란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지만 원어에 보면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다섯번째, 불음주도 단지 술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곡주나 과일주 등 취기 있는 것에 취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재가의 신자들이 지킬 수 있도록 부드럽고 인간적인 계율로 되어 있다.
그밖에 삼보에 대한 귀의도 단순한 삼귀의가 아니라 부처님은 어떠한 분이기에 귀의해야 하는가를 빠알리 니까야에서 배워야 한다.
“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으신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추신 님, 올바른 길을 가신 님, 세상을 이해하시는 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님, 사람들을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으신 님, 세상에 존경받는 님이시옵니다.”
가르침은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귀의처가 될 수 있는가. 빠알리 경전에 나와 있듯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세상의 존경받는 님께서 잘 설하신 가르침은 현세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며, 승화시키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이 하나하나에게 알려지는 가르침입니다.” 승가는 어떠한 모임이 되어야 하기에 귀의처가 될 수 있는가.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승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모임은 정직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모임은 현명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합니다. 이와 같이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들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시고, 대접받을 만하시고, 선물받을 만하시고, 존경받을 만하시고, 세상에 가장 높은 복전이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삼귀의가 이와 같이 일상적 신앙형태로 자리잡고 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설해져 있다. 그리고 야쇼다라비가 라훌라에게 지어준 부처님을 찬탄한 시 ‘인간 사자의 노래(naras1-ha ga-tha)’는 널리 재가의 일상생활에서 애송되는 시이다. 부처님이 모든 중생의 아버지, 사생(四生)의 자부(慈父)라는 대승불교의 이념은 야소다라비가 아들을 위해 지은 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붉은 성스러운 두 발은 탁월한 법륜으로 장식되고, 긴 팔꿈치는 성스러운 징표들로 치장되셨고, 발등은 불자(拂子)와 양산으로 분장되셨으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우아하고 고귀한 석가족의 왕자님, 몸은 성스러운 징표로 가득 차시고, 세상의 이익을 위하는 사람 가운데 영웅이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얼굴 빛은 보름달처럼 빛나고 하늘사람과 인간에게 사랑받으며, 우아한 걸음걸이는 코끼리의 제왕과 같으시니 인간 가운데 코끼리,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왕족으로 태어난 귀족으로서 하늘사람과 인간의 존귀함을 받는 님, 마음은 계율과 삼매로 잘 이루어진 님,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잘 생긴 목은 둥글고 부드러우며, 턱은 사자와 같고, 몸은 짐승의 왕과 같고, 훌륭한 피부는 승묘한 황금색이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훌륭한 목소리는 부드럽고 깊고, 혀는 주홍처럼 선홍색이고, 치아는 스무개씩 가지런히 하야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칠흙같은 심청색이고, 이마는 황금색 평판처럼 청정하고 육계는 새벽의 효성처럼 밝게 빛나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많은 별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달이 창공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수행자들의 제왕은 성스러운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15]
모든 중생의 안락을 기원하는 〈자비의 경〉이나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설한 〈행복의 경〉 〈보배의 경〉 등은 누가 읽어도 타당하고 누가 읽어도 아름다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재가신도들이 일상적으로 외우도록 설한 경전들이다.
이를테면 《숫타니파타》의 〈행복의 경〉[16]과 같은 독송용 게송의 예를 들어보자.
분수에 알맞는 장소에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아서 스스로 바른 서원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이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일을 함에 혼란스럽지 않은 것 이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이옵니다 나누어 주고 정의롭고 친지를 보호하는 것과 행동함에 비난받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이옵니다 악을 싫어하여 멀리하고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이옵니다 존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적당한 때에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이옵니다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적당한 때에 가르침을 논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이옵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지극히 일상적고 합리적인 가르침을 재가신도들이 매일 독송하길 권했다. 부처님의 몇몇 경전은 단지 가르침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신앙으로 발전해왔는데 지옥이나 천상보다는 우리가 탄탄히 발을 딛고 있는 지상에서의 자율적인 참다운 삶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타율적이고 초월적인 대승의 신앙고백을 보완하는 데 손색이 없다. 아마도 우리가 외우거나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반야심경》처럼 외우게 한다면 훌륭한 보살로 성장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1) Vin. II. 139. [Return to Text]
2) Vinaya Texts III = Sacred Books of the East XX, p.151. [Return to Text]
3) W. Geiger. PA-LI, Literatur und Sprache. Verlag von KarL J. Tru..bner. Strassburg. 1916. p.4. [Return to Text]
4) Vism. p.521 pat.imukhamito iti vutto hetu samu-ho aya pat.icco ti, sahite uppa-d-eti ca iti vutto so samuppa-do [Return to Text]
5) SN. II. p.28;p.65;p.70;p.96;Ud. p.2;MN. I. p.262;p.264. [Return to Text]
6) M. Bunge; Causality and Modern Science. Third Ed. Dover Publications, Inc. New York. 1979. [Return to Text]
7) ga-magha-ta, pa-ripanthaka, parada-rika:17, 18, 19의 도둑들은 마을의 약탈자와 노상강도, 가정파괴범을 말한다. [Return to Text]
8) SN. II. p.32. [Return to Text]
9) AN. I. 249. [Return to Text]
10) AN. I. 250. [Return to Text]
11) DN. II. 72. [Return to Text]
12) DN. II. pp.294∼295. [Return to Text]
13) MN. II. 148. [Return to Text]
15) K. Sri Dhammananda. Daily Buddhist Devotions. Buddhist Missionary Society, Kuala Lumpur (1991). p. 216. [Return to Text]
Updated: February 05,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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