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문 동영상 제목 : 초전법륜경(23) : 2016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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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법륜경 법문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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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를 이렇게 12가지 지혜로써 어떤 사성제에 대해서 아신 것을 지금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것이 고성제와 관련해서 삿짜냐나(saccañāṇa)가 생겨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인데 여기서 먼저 이당(Idaṃ) ‘이것은’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이게 고성제다”라고 내게 이전에 들어본 적 없던 법들의 지혜의 눈이, 지혜가 등등이 생겨났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무엇이냐는 거죠. 이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이것이 고성제다.’ 자띠둑카(jātidukkha). 태어남의 고통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상킫떼나(saṃkhittena) 요약하면 빤쭈빠다나(pañcupādāna) 오취온이라고 하는 둑카(dukkha) 고통입니다. 이것이 뭐냐면, 자띠(jāti) 탄생으로 시작해서 우빠다낙칸다(upādānakkhandha)라는 오취온으로 끝나는 성품들, 이것들을 말합니다. 핵심은 오취온입니다.
오취온을 경전적 용어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고, 자기 안에 생겨나는 경우로 이해하는 경우가 적습니다. 핵심은 자기 안의 경우로 아는 것이지 이것을 경전적인 의미로, 말로써 이해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냄새 맡고, 맛 보고, 닿고, 알 때마다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 오취온입니다. 이것들이 성인들의 시각으로는 두려울 만한 고통입니다. 그래서 아리야삿짜, 성인들이 깨닫는, 삿짜 진리다. 어떤 아리야삿짜냐면, 두캉아리야삿짜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성인들이 깨닫는 진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오취온이 성인들의 시각에서는 굉장히 두려운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절대 고통이라고 여기지 않고, 행복이라고 여기고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누구나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싶고, 좋은 소리를 듣고 싶고, 좋은 맛, 좋은 감촉 좋은 생각들 마음이 기뻐지는 즐거워지는 생각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게 삶의 행복이라고 여기고 이것들이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특히 감촉과 같은 것은 욕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은 이 좋은 감촉이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도 자기 마음껏 생각하고 상상하고 이것도 굉장히 좋다고 여깁니다. 수행처에 온 수행자들 가운데 ‘수행처에 오니까 생각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고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생각하면 좋을 텐데 생각하지 말라고 하니까 그게 굉장히 괴롭고, 굉장히 상실감을 느낍니다. 굉장히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굉장히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이런 생각까지 모두 사라진다라고 하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큰 것을 잃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이 모든 것들이 오취온이라고하는 고통스러운 성품을 가진 고성제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보게 되었을 때에는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나로 인해서 내 안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찰나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생명하고 있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고통스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된다면 수행도 잘 되어야 되지요? 그런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성품대로만 되는 그러한 것이라서 이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사실대로 알고 보기 위해서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다라고 여기는 무명에서 기인한 시각을 제거하고, 이것들의 본질적인 성품을 알고 보기 위해서, 점점 더 실제적으로 자세히 알고 보기 위해서 위빳사나를 수행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위빳사나의 8정도를 완전히 개발하셨고, 성인의 도의 지혜도 완전히 얻으시면서 최고의 가장 고귀한 종류인 행복이라는, 열반이라는 행복을 알고 보셨습니다. 이렇게 가장 좋고 귀한 열반의 행복을 보시니까, 찰라도 멈추지 않고 생멸하고 있는, 그렇게 끊임없이 조건을 만들어 줘야되고, 붙들 수 없이 무너지고 있는 소란스러운 이런 것들이 진짜 고통이라는 것을, 두려운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고성제의 법이다.’라는 삿짜냐나가 고성제의 고통의 법들 안에 부처님께 생겨나신 것입니다. 뿝베아나누숫떼수 담메수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 안에 지혜가 생겼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 배워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도 어떤 방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지혜를 통해서 8정도를 개발함으로써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뿝베아나누숫떼수 담메수 짜쿵 우다빠디 등으로 말씀한 것이 삼마삼붓다라고 하는 공덕, 다른 이에게서 어떤 방법과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지혜의 힘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를 완전히 온전히 깨달으신 부처님이라는 삼마삼붓다라는 의미이죠. 이 삼마삼붓다가 되었다라는 것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던 법들에 대해서 이런 지혜가 생겨났다.’라고 부처님께서 공포하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데 왜그러냐 하면 처음 초전법륜경 법문 시작할 때 이야기한 것처럼 그 당시 나체수행자들이 하는, 먹지 않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수행이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고 가장 고귀한 수행이라고 대부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지금 수행해서 안 것은 다른 이들이 하고 있는, 다른 이에게서 들어본 그런 종류의 수행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들어본 대로 가늠하고 숙고해서 또 다른 견해를 발생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
불교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이야기하시는 분들은 그 당시에 있었던 많은 견해에서 하나의 발전된 견해로 불교라는 사상이 생겨났다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비슷한 말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절대로 같은 사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들어본 것들,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가늠하고 숙고해서 안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지혜로 수행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완전히 보고 깨달은 것이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본인이 삼마삼붓다라는 진짜 부처님이라는 것을 그때 법문을 듣고 있던 청중들, 5비구와 많은 천인과 범천인들에게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신 것처럼 들어보신 적이 없이 지혜가 생긴다라는 것은 오직 붓다라고 하는 분들과만 연결이 되어집니다. 삼마삼붓다라는 일체지를 가진 부처님, 그리고 빳째까붓다라고하는 벽지불, 이분들과만 관련 되어지고 그 이외에 5비구부터 시작해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들어서야만 이것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방법에 따라 수행해야만 이런 종류의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조건 지워진 모든 물질과 정신현상이라는 오취온이 고통이구나.’라는 지혜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수행하는 수행자에게 생겨납니다. 이 말씀을 듣고 따라서 수행했을 때 이것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러한 지혜를 얻고 싶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했을 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등등의 모든 오취온이 진정한 고통의 법이라고 알고 볼 수 있고, 이렇게 알고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알고 보라고 부처님께서 설법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특별한 지혜가 생겨나는 것을 5가지로 표현하셨는데, 첫 번째 짜꾸우다빠디, 눈이 생겼다. 두 번째 냐나우다빠디, 지혜가 생겼다. 세 번째 빤냐우다빠디 구분해서 보는 지혜가 생겼다. 윗짜우다빠디 꿰뚤어 보는 지혜가 생겼다. 알로코 빛이 생겼다라고 5가지로 이야기하셨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지혜라는 같은 뜻을 가진 다른 이름들일 뿐입니다. 지혜가 볼 수 있다라는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짜꾸 눈이라고 표현을 하셨고, 이 지혜가 알 수 있다라는 성품으로 인해서 냐나 지혜라고 하셨고, 이 지혜가 구분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빤냐라고 이야기 하셨고, 이 지혜가 꿰뚤어 알 수 있기 때문에 윗짜라고 표현을 하셨고, 이 지혜가 밝혀서 알 수 있기 때문에, 밝히는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알로까라고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무애에도 빨리에서 해설하는 모습을 보면 짜꾸, 눈이라고 하는 것은 빨리어 용어일 뿐이고, 진짜 알게 하고자 아는 것은 본다라고 하는 의미, 본다라고 하는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알게 하고자 하는 의미를 의도해서 법문 듣는 청중들이 좀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이름으로 설명한다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을 보면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은데 이것을 웨네야짜사야 때문이라고 합니다. 웨네야 구원 되어질 중생들의, 앗짜사야 성향, 어떤 좋아하는 것들, 바램에 따라서 법문을 하는 것입니다.
법문을 할 때 현대의 법사님들도 같은 뜻을 가진 단어들을 반복하는 일이 있는데 첫 번째 단어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두 번째 단어로 이해하도록,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같은 뜻을 가진 단어로 반복해서 설명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말하느냐 저렇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성품이 있느냐, 어떤 성향이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듣는 사람이 더 알아듣기 쉬운 말들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뜻을 가졌지만 부처님께서 이렇게 5가지로 이야기하셨는데, 눈이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듯이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지혜를 눈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눈이 멀었던 사람이 어떤 치료를 통해서 눈이 좋아지면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위빳사나 지혜나 성인의 도의 지혜가 생기기 전에는 이 오취온의 법들을 행복하고 항상하고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듣고 냄새 맡는 순간 등등의 끊임없이 주시하는 수행자는 이것이 ‘찰나도 멈추지 않고 생멸하고 있는 두려운 고통의 법이다.’라고 보게 됩니다.
마치 ‘눈을 감고 사는 장님이었다가 눈을 떠서 보게 된 것과 같다.’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볼 수가 없었죠. 그런데 수행을 통해 지혜의 눈으로 이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에 눈과 같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냐나우다빠디, 냐나도 아는 성품입니다. 지혜가 생긴다는 것은 결국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습니다.
세 번째 빤냐우다빠디, 빤냐도 구분해서 아는 성품이라는 뜻으로 이야기했다라고 했습니다. 이 빤냐라고 하는 것, 위빳사나에서 자주 표현을 하는데 부름 꺼짐 등등으로 주시할 때 뻣뻣하고, 긴장되고, 떨리고, 움직이고, 이런 성품이 따로이고, 이것을 주시해서 아는 성품이 따로라고 구별해서 아는 지혜를 빤냐 구분해서 아는 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식으로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아는데, 보통의 사람들은 이렇게 직접적인 경험으로 구분해서 알지 못합니다. 이론상으로는 알지는 모르지만 직접적인 경험으로 이것들을 분명히 구분해서 알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원인과 결과도 구분해서 알고 새로새로 생겨나고 사라져가는 것도 구분해서 알게 되고, 생겨나서 사라지면서 항상하지 않는 것, 두려운 고통인 것, 그것들 성품대로 생겨나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법이다. 이런 성품의 법이다라는 것들도 구별해서 압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알 때 이런 듯, 저런 듯, 아는 듯, 모르는 듯, 불문명하고, 흐릿하고, 혼탁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손 위에 어떤 물건을 올려놓고 보는 것처럼 분명히 구별해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빤냐라는 지혜의 성품입니다.
다음으로 윗짜우다빠디 꿰뚫어 아는 성품이 여기서 알게 하고 싶은 의미입니다. 이 앎은 꿰뚫어아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꿰뚫어 안다는 것의 의미를 알기가 어려워서, 마하시스님께서 1930년대 후반쯤에 고향마을의 큰스님과 함께 여기에 대해서 토론한 적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하시 스님께서 ‘볼 때, 들을 때, 보는 것을 아는 것, 듣는 것을 아는 것, 이런 앎들이 생길 때마다 이것들을 끊임없이 따라서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으면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아는 지혜가 생겨난다.’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여기 큰 스님께서는 ‘그렇게 주시해서 아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라고 여기셨다라고 합니다. 수행을 하신 분이 아니고 교학적인 것들만 보신 것 같아요.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지혜란 꿰뚫어 알아야 한다. 꿰뚫어 알아야 지혜라고 부른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께서 ‘그럼 어떻게 꿰뚫어 압니까? 꿰뚫어 아는 것이 뭡니까?’라고 여쭤보니까, 큰 스님께서 한참 생각하신 다음에 ‘꿰뚫어 아는 것이 꿰뚫어 아는 거지 뭐.’ 이렇게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지혜를 꿰뚫어 알아야 된다라고 하는데 지혜의 꿰뚫어 아는 성품이 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초전법륜경 초반에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했습니다.
꿰뚫어 안다는 말을 빨리어로 빠띠웨다입니다. 빠띠는 향한다는 뜻, 정면으로 곧게라는 뜻이고, 웨다는 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법적 의미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초전법륜경 초창기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휘장이나 벽이 가리고 있어서 휘장에 구멍을 내면 휘장 너머가 보이는 것처럼, 벽에 창문을 열어버리면 창문 뒤가 보이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뚫어서 보이는 것들이 마치 어리석음이라는 장막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뚫어서 볼 수 있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꿰뚫어 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무상, 고, 무아라는 성품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음이라는 장막이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하고 행복하고 자아로써만 볼 수 있는데 위빳사나 지혜가 강력해지면 이 어리석음의 가리개가 열리게 되는 것처럼, 이 장막이 뚫리는 것처럼 분명하게 그것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추측이 아니고 눈으로 보듯이 이렇게 분명하게 보는 것을 꿰뚫어 안다라고 했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꿰뚫어 아는 특별한 지혜가 생겨난다라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알로꼬우다빠디, 빛이라는 것도 밝히는 성품이 주된 의미라고 했습니다. 빛이라고 하니까 또 수행에서 ‘빛이 생겨났다.’라고 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특별한 빛들을 보게 될 때.
여기서는 눈으로 보는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으면 모든 것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죠?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어서 제대로 알게 할 수 있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무상, 고, 무아라고 분명히 존재하는 성품들을 무명이라고 하는 어둠이 뒤덮어 두어서 캄캄하게 가리고 있는데, 이것을 볼 수 없다가 위빳사나 지혜나 성인의 도의 지혜가 생겨나는 순간에 마치 빛이 생겨나는 것처럼, 이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드러내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빛이 생겨났다.’라고 이야기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성제를 아는 삿짜냐나, ‘이것이 고성제다. 이것이 고통이라는 법이다.’라고 아는 그런 눈이라고 하는 것, 지혜라는 것, 구분해서 아는 지혜, 꿰뚫어 아는 지혜, 지혜라는 빛이 생겨났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고,
두 번째로 고성제와 관련해서 낏짜냐나,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비구들이 그러한 성품이 있는 이 고성제를 구분해서 알아야 하는 법이라고 내게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었던 법들 안에 역시 지혜의 눈이 생겨났다. 지혜가 생겨났다. 빤냐라고 하는 구분해 아는 지혜가 생겨났다. 꿰뚫어 아는 지혜가 생겨났다. 지혜의 빛이 생겨났다.’-이 뒷부분은 똑같습니다. -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고성제와 관련해서 해야 할 일을 아는 낏짜냐나가 생겨나는 모습입니다.
‘그러한 성품이 있는 이 고성제를...’이라고 했는데, 어떠한 성품이 있느냐하면 ‘진정한 고통이 있는 성품이 있고, 자띠로 시작해서 우빠다나칸다라는 오취온으로 끝나는 성품이 있는 그러한 종류의 고성제의 법을 구분해서 알아야 하는 법이다.’라고 해야할 일을 아는 특별한 지혜도 생겨났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성제의 법들 중 핵심은 오취온이라고 했고, 오취온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면 고성제를 모두를 아는 일이 끝나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 오취온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했는데 보고, 듣고, 닿고, 알 때마다 육문에서 분명하게 생겨나는 법이라고 했고, 이것들이 생길 때마다 따라서 주시하면 스스로 직접 알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주시해서 흙의 요소의 딱딱하고, 거칠고, 부드럽고, 매끄럽고 이런 성품을 구분해서 알아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이죠.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고성제를.
물의 요소의 흐르고, 촉촉하고, 뭉치고 이런 종류의 액체적인 성품을 구분해서 알아야 하고, 불의 요소의 뜨겁고, 차갑고, 따뜻한 성품, 바람의 요소의 뻣뻣하고, 긴장되고, 뻣치고, 밀고, 떨리고, 움직이는 이러한 성품을 구분해서 알아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모습은 지금 수행하시고 있는 것처럼 몸 안에 알아차림과 지혜로써 집중해서 어떤 한 속에 마음을 모으게 되면, 어떤 한 곳에서의 접촉을 주시하고 있으면, 이 4대 요소 중 한 가지를 원래 성품대로 구별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4대 요소를 안 다음에는 4대 요소에 의지해서 생기는 우빠다루빠를 알게되어집니다. 물질에는 2종류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4대 요소라고 하는 바탕이 되는 아주 분명한 물질과 그것을 의지해서 생기는 물질들이 있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봄, 들음 등으로 주시할 때 봄의 의지처인 눈, 들음의 의지처인 귀, 이런 것들을 뜻합니다. 그뿐 아니라 색이나 소리와 이런 종류의 대상인 물질들도 역시 4대 요소를 의지해서 생기는 물질입니다.
이렇게 물질의 것들을 4대 요소와 그것을 의지하는 물질을 알게 되면 보는 앎, 듣는 앎, 보는 접촉, 보는 느낌 등의 정신적인 마음과 마음 부수라는 법들도 알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물질과 정신을 분명한 것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점점 더 자세한 것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알게 되어졌을 때 개별적인 것들을 안 다음에는, 이것들이 주시할 때마다 주시되는 대상 뿐만 아니라, 주시하는 마음까지 계속해서 생기고 사라지면서 항상하지 않다라는 것, 고통스럽다라는 것, 이것들도 스스로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이것을 경전에서 후뚜와 아바와또 아닛짜, 후뚜와 생겨나서는, 아바와또 사라지기 때문에, 아닛짜 항상하지 않다라고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다야빠야 빠띠삘라나띠나 둑카, 우다야빠야 생멸이, 빠띠삘라나띠나 끊임없이 고문하고 있기 때문에, 둑카 두려운 고통이다.
이것은 실제 수행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시는 분들이 아니면 끊임없는 생멸이 이렇게 괴롭히는 것과 같다라고, 고통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알지 못합니다. 수행을 통해서 끝없는 생멸을 보게 되면 이것이 괴롭히고 있는 고통과 같다라는 것을 이렇게 알고 보게 되고, 아왓사와따나디나, 왓사 바람대로, 와따나 따라지지, 아 않다는 의미 때문에, 그것 마음대로 그것 자신의 성품대로 생멸되고 있기 때문에 자아가 아니고 통제할 수 없는 성품의 법일 뿐이다라고 이렇게 무상, 고, 무아도 구분해서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겨나고 있는 물질과 정신을 주시해서 무상, 고, 무아라는 상황들로 스스로 직접 보아서 아는 것이, 구분해서 알아야 하는 법인 고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정말 생멸하고 있는 오취온이라는 고성제를 무상으로 시작하는 상황으로 구분해서 알아야한다라고 아는 그런 지혜가 부처님께 -누구에게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알아야 한다라는 지혜가 생겨났고, 꼰단냐 존자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부처님께 혹은 부처님의 제자께 들은 뒤에 이 지혜가 생겨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초전법륜경에서 ‘고성제가 구분해서 알아야하는 법이다.’라고 분명히 설해두셨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생멸하고 있는 오취온이라고하는 고성제의 법을 주시함으로써 분명히 구별하여 알아야한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론상으로 들어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에 따라서 생각한 것을 깨달음이라고 여기고 수행 보고할 때도 자기가 생각하고 느낀 것을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봄으로써 구분해서 알아야 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낏짜냐나 고성제에서 해야할 일을 아는 지혜라고 아는데 이것은 성인의 도에 도달하기 전부터도 생겨나는 지혜입니다. 할 일을 알아야 할 일을 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보는 것도, 무상, 고, 무아라고 구분해서 알아야 하고 듣고, 냄새 맡고, 이 모든 것들을 주시를 통해서 무상, 고, 무아라고 알아야 한다라고 위빳사나를 수행하기 전부터도 들어서 알아 두어야하고, 수행하면서도 이해하고 알아야 하고, 이렇게 알아 두었을 때에만, 주시해야만 하는 오취온을 완전히 주시함으로써 위빳사나 지혜를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방법을 배울 때부터 이것을 듣고 이러한 지혜가 생겨나는데 주시하다가도 처음에는 아직 어떤 것들이 주시해야되는 법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보다 보면 ‘어, 이것도 알아차림 해야되는 거였네?, 저것도 알아차림 해야되는 거였네?’라고 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해야되는 법들이고 분명히 알아야하는 법들이라는 것을 수행자가 자기 수행 안에서 점점 더 공손히 존중해서 수행하는 수행자라면 그것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은 할 일을 아는 지혜인데, 구분해서 알아야하는, 할 일을 아는 이 낏짜냐나는 성인의 도에 도달하기 이전에 위빳사나 수행 이전부터 시작해서 수행하는 동안 계속 생겨나야 되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마직막으로 고성제에서 까따냐나입니다.
“비구들이 이런 성품이 있는 이 고성제를 구분해서 알았다. 구분해서 아는 일이 끝났다라고 나 여래에서 이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 안에 이러한 지혜들이 생겨났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고, 듣고 등의 오취온의 고성제의 법들을 주시해서 무상, 고, 무아라고 알고 있는 것이 위빳사나의 지혜인데, 위빳사나의 지혜로 아는 것만으로는 구분해서 아는 앎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시한 대상은 무상, 고, 무아라는 것을 분명히 보았지만, 주시되지 못한 대상들에서는 영원하고 행복하고 ‘나’라고 하는 그런 종류의 사견과 무명이 또다시 자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시해서 아는 위빳사나의 지혜가 완성될 때, 성인의 도의 지혜를 통해서 열반이라는 소멸의 성분을 보게 되었을 때, 성인의 도의 지혜가 생겨난 다음에, 열반이라는 소멸의 성분을 본 다음에야 무상, 고, 무아라는 앎은 확고해집니다. 이때 바로 고성제를 구분해서 아는 것이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수다원의 도의 지혜로는 고성제를 구분해서 알았다라는 것,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앎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라한의 도의 지혜로 본 다음에야 고통을 구분해서 앎이 남김없이 모두 끝나고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다원이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보게 되는 것이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에 가진 법들이죠. 이것들이 점점 더 성숙되고 완성되어져서 아라한의 지혜로 본 다음에야 이것이 완성된 것이고, 부처님께서도 아라한의 도,과에 도달하시고 붓다가 되신 때에 고성제를 구분해서 앎이 남김없이 모두 끝나고 완성되어져서 ‘구분해 알았다. 구분해 아는 일이 완전히 끝나고 완성되었다라고 아는 지혜의 눈이 생겨났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분들, 저 역시 수행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이 고성제를 구분해서 알기위해서 최후에 아라한의 도와 과에 도달해서 이 앎이 완전히 끝나도록 완성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때에는 이렇게 위빳사나를 발생시키는 것들이 강력해지고, 완성되게 되었을 때, 아라한의 도와 과에 반드시 도달하게 될 것이고, 윤회를 끊는 종류의 선업은 그 결과가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빠르고 느리고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을 계속해서 쌓아가고 있는 한 그 길의 끝에 반드시 도달하게 될 것이고, 이 길의 끝에 도달해서 반조의 지혜를 통해서 구분해서 하는 일이 이제 끝났다라고 반조해서, 숙고해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고성제와 연관해서 삿짜냐나, 고성제라는 것을 아는 지혜, 낏짜냐나 구분해서 알아야한다라는 할 일을 아는 지혜, 까따냐나 그 할 일이 끝났다라는 것을 아는 지혜, 이 3가지 지혜 모두가 끝났습니다.
한 번 더 요약을 하자면 보는 때 등의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성품의 법을 진짜 고통이라고 아는 것이 삿짜냐나, 이 고성제의 법들을 주시해서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라고 아는 것이 낏짜냐나, 구분해 아는 일이 끝났다라고 숙고해서 아는 것이 까따냐나입니다.
이 3가지 중에 첫 번째 삿짜냐나는 위빳사나를 주시하는 동안에도 생멸하는 법들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죠? 위빳사나를 주시하는 동안에 생겨납니다. 그뿐 아니라 성인의 도의 앞부분에 생기는 것입니다. 성인의 도의 순간에도 열발이라는 소멸의 성분을 알고 보고는 생멸되는 모든 조건지어진 법이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일이 끝난다라고 했기 때문에 열반의 순간에도 이 삿짜냐나는 생겨납니다. 고성제를 아는 지혜.
이것이 끝난 다음에도 성인의 도 이후에서도 숙고해서 아는 앎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성인의 도 뿐만아니라 그 앞 뒤의 시기에서도 사성제를 아는 것이 이 삿짜냐나입니다. 시기적으로 성인의 도에서 뿐만아니라 그 앞에도, 그 뒤에서 생겨나는 것이 삿짜냐나입니다.
고성제를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라는 낏짜냐나라는 할 일을 아는 지혜는 성인의 도의 순간 이전 시기부터 생겨나 있어야만 한다라고 했습니다. 위빳사나를 수행하기 전부터 그리고 수행하는 동안은 이것들이 생겨나서 이것에 따라 수행했을 때에만 성인의 도를 발생시킬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낏짜냐나는 알아야 할 것, 제거해야 할 것, 도달해야 할 것, 개발해야 할 것을 알아두는 것이 낏짜냐나이고 이것들은 처음 이전부터 생겨나 있어야 한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이 4가지 일이 끝났다라고 아는 까따냐나는 성인의 도,과가 끝난 다음에 반조의 지혜가 생기죠? 빳짜와카나냐나라고 하는 반조의 지혜가 생긴다고 했는데 이 반조의 지혜를 통해 숙고 했을 때에야 이것이 생기고, 특히 아라한의 지혜가 생겨났을 때에는 우씨땅브라마짜리야 아라한들이 하는 말이 있죠? 브라마짜리양 고귀한 수행을, 우씨땅 수행했다. 수행하는 일을 마쳤다. 까땅 까라니양 까라니양 할 일을, 까땅 했다. 할 일을 마쳤다.
출가자의 할 일이 번뇌를 제거하고 아라한의 도,과를 얻은 것입니다. 그것이 끝날 때까지는 할 일을 마치지 않은 것입니다. ‘할 일을 마쳤다. 더 이상의 새로운 생은 없다.’ 등으로 숙고를 합니다.
이때 생겨나는 것이 까따냐나다. 할 일이라고 하는 낏짜가 끝나면 끝났다라는 것을 보는 것이 까따냐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의 도를 통해서 열반을 깨달으면서 -깨닫는다는 것은 열반에 도달하는 것, 열반을 눈앞에 보는 것처럼 눈앞에 둔 것을 뜻합니다.- 고통을 구분해서 알고, 집착을 제거하고, 도를 개발한다는 이 세가지 일도 완성시켰고, 이렇게 4가지 일을 했다라는 것, 사성제를 깨닫는 일이 완성되어졌다. 사성제의 각각의 해야할 일들을 완성시켰다라고 아는 이 까따냐나는 아라한의 도로 이 모든 일들이 끝났을 때에 생겨나고 끝나면 끝난 것을 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삿짜냐나라고 하는 고성제를 아는 지혜는 위빳사나의 순간 그리고 도의 지혜의 순간, 도의 지혜 이후의 순간에도 생겨나고, 낏짜냐나라고 하는 할 일을 아는 지혜는 위빳사나의 순간부터 위빳사나를 수행하기 전부터 이미 생겨나 있어야 한다라고 했고, 까따냐나는 도,과의 지혜를 깨달은 후에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고성제에서 이 3가지 지혜까지 이야기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저희가 지금 수행하고 있는 것들은 이러한 도와 과를 깨닫기 위해서 8정도를 개발하고 도와 과의 지혜가 어느 날인가는 완전히 생겨나게 될 것이고, 어느 날인가는 이렇게 반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무리
수행을 통해서건 삶을 통해서건 큰 것들이 그것들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것들이 생겨났을 때, 내고 있는 마음의 방향성들, 그래서 빠르고 늦건 그 길의 끝까지 갈 것이다. ‘바라밀이 되는 어떤 선업을 쌓았다라면’이라고 했는데, 빠르고 늦는 것의 차이는 작은 모든 것들을 만났을 때 결정되는 마음의 방향성입니다. 그것이 법으로, 바른 것으로, 청정한 것으로 이렇게 되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향하는지에 따라서 이 마음의 방향성들이 계속해서 가게 되고, 이러한 방향성과 흐름이 완전해진 것이 수다원입니다. 그래서 방일하다고 하지만 7생 이상은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수행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방향성을 번뇌의 흐름 쪽으로 가는 방향성을 계속 내고 있습니다.
저희 처음에 계율을 받을 때 ‘우리의 이 계율이 열반의 조건이 되어지기...’를 이라고 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과 열반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계율이 번뇌를 제거한다라는데 그렇기는 할까? 라고 하는데, 계율을 깰만한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 마음이 바른 쪽으로, 지켜야 하는 쪽으로 향하는 것, 이것이 마음의 방향성이고, 이것은 수행을 통해서도 삶을 통해서도 이런 방향성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8정도라고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끝없이 마음의 방향을 만들어서 마음의 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들이 우리에게 매 순간 생겨나고 잘못된 길을 따르지 않도록 이런 바른 길을 끝없이 걸어서 빠르게 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생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에서 바르지 않은 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것을 따를 수 있는 것을 용기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용기를 구족되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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